[아름다운 우리말] 참성이라는 말
오늘도 여러 책을 읽으며 진리를 공부하다가 ‘참성(僭聖)’이라는 표현에서 한참을 머물러 있었습니다. 사전에는 나오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사전에 없는 말이 참 많다는 생각을 새삼 합니다. 참성의 참(僭)은 어긋난다는 뜻으로 ‘참람(僭濫)하다, 참칭(僭稱)하다’라고 할 때 쓰입니다. 참람하다는 말은 분수에 넘쳐 지나치다는 의미입니다. 참칭이라는 말은 멋대로 분수 넘치게 스스로를 무엇이라고 칭한다는 의미입니다. 사전의 예에는 왕을 참칭하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스스로를 대단하다고 착각할 때 쓰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성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스스로를 성인이라고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성인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책에서 참성은 깨달음의 적이고, 깨달은 이의 적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깨달은 이의 세 강적 중에서 가장 나쁜 강적이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성인인 척하는 것이 깨달은 이를 모욕하고, 신체에 위해를 가하는 것보다도 더 나쁜 적인 셈입니다. 척하는 것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이 깨달은 척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척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없으면서 있는 척하고, 모르면서 아는 척합니다. 잘난 척, 예쁜 척 등도 있습니다. 갑자기 ‘귀여운 척’이라는 표현이 생각나네요. 척 중에는 위험한 게 많습니다만, 그중 최악은 깨달은 척, 성인인 척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을 나쁜 쪽으로 이끌고, 참된 사람을 욕합니다. 참성하는 이와 진짜 성인의 차이는 무얼까요? 일단 대부분의 성인은 스스로를 성인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공자도 맹자도 성인이냐는 물음에 손사래를 쳤습니다. 성인이어도 스스로를 성인이라고 하기에는 두려움이 있었을 겁니다. 저는 성인은 겸손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겸손하게 진리의 길을 가고, 진리의 편이 되는 이가 성인인 겁니다. 참성하는 이는 정반대의 삶을 삽니다. 참성하는 사람을 설명해 놓은 것을 보고, 저도 반성의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참성하는 이는 스스로가 깨달았다고 착각하며, 다른 이를 무시(無視)하고 업신여깁니다. 무시한다는 말은 그야말로 눈에 뵈는 게 없다는 뜻입니다. 진리의 길에 서 있다면 더 낮은 곳, 더 아픈 곳을 바라보아야 하고, 찾아야 합니다. 저는 업신여긴다는 말은 ‘없이 여기다’라는 말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즉 없는 사람 취급을 하는 겁니다. 당연히 저 잘난 맛으로 사는 사람인 겁니다.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남도 귀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모든 이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 가짜입니다. 참성하는 사람이 나아가는 방향은 아프고 낮은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화려하고 높은 곳입니다. 권력에 집착하고, 명예에 집착하고, 돈에 집착합니다. 권력자와 가깝고, 돈 있는 자와 가깝습니다. 무슨 무슨 자리에 연연합니다. 권력자와 가까운 것이 자랑이고, 권력마저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돈 있는 자와 가까운 것이 기쁨이고, 더 많이 소유하려고 합니다. 명예를 소중히 여긴다고 하지만, 들여다보면 직위를 탐내는 것입니다. 명예는 희생에서 오는 겁니다. 희생이 빠진 명예는 그저 자리에 대한 집착일 뿐입니다. 참성이 진리를 방해하는 강적이라는 말이 진리를 공부하고 생각하는 동안 더 다가옵니다. 왜 가장 나쁜 강적으로 표현하였는지 알겠습니다. 참성이라는 단어를 살펴보면서 내가 나아가는 방향을 돌아봅니다. 돈이 좋고, 힘이 좋고, 자리가 좋고, 그런 사람들과 아는 게 기쁜 삶이네요. 그러고 보면 참성은 멀리에 있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 그런 사람임을 모르고, 그런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고 있다면 참성의 삶을 살고 있는 겁니다. 나 스스로가 진리를 방해하고 있는 사람임을 뼈아프게 느낍니다. 참성이 아닌 척 살고 있었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진짜 성인 사람 취급